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당 전쟁 (문단 편집) === 정치, 경제적 이유 === 관료 집단의 문제나 내란 등이 있었던 것은 당나라도 고구려와 똑같았으나 그 전에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의 기본적인 국력 차이가 있었다. 당나라의 경우 최소한 본토는 위협받지 않는 강대국이기 때문에 외세의 압력을 덜 받을 수 있었지만[* 이 당나라조차도 당태종 초중반까지는 토번과 말갈을 비롯한 외세를 견제해가며 고구려를 상대했기에 [[안시성]] 전투 등에서 탈탈 털린 것이었다. 이에 당태종은 고구려 이전 주변국들부터 정리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었고 그렇게 정리를 해 놓고도 토번의 성장을 막지 못해 고구려 멸망 후 탈라스 전투에서 대패하게 된다.], 고구려는 당나라라는 중원통일왕조의 강대국과의 전쟁에서는 제한적인 선제공격을 제외하면 방어전으로 일관해야 했기 때문에 고구려 영내의 손실이 심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고구려가 당나라보다 상대적으로 국력이 적은 입장에서는 더 힘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광개토대왕]], [[장수왕]]으로 대표되는 [[고구려]]의 대외 영토 확장은 중원이 [[오호십육국시대|5호 16국]]의 분열 상태였음을 기회로 활용한 결과였다. 이후 중국에 [[수나라|수]], [[당나라|당]]의 통일 왕조가 들어서면서 고구려는 제한적인 선제공격을 제외하면 방어에 주력해야 했다.] 특히 [[당나라]]는 과거 [[고구려-수 전쟁]]에서의 국제 외교 실패의 교훈을 바탕으로 주변국과 이민족을 최대한 통제하려고 애를 썼다. 1차 여당전쟁 전에 당나라는 주변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노력을 했다. 대표적으로 분열된 동서 돌궐을 정복하고, 오늘날 티베트에 해당하는 토번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안정화를 추구하며 그 노력을 더욱 강화했다. 이렇게 노력한 결과 2차 고구려-당 전쟁 시점에서는 거란족의 상당수가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당으로 이탈하였고, 역으로 동아시아에서 고구려가 상대적으로 고립되는 형국이 되면서 [[당나라군|당나라 군]]은 처음으로 겨울에도 고구려 내지 땅에서 전선을 형성하여 장기 주둔을 할 수 있는 전쟁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신라]]를 통하여 고구려의 가장 불안전한 남부 전선을 괴롭히는 성과를 올렸다. 이에 맞선 고구려는 [[영류왕]] 당시 제대로 국제적인 연계를 하는데 있어 유기성이 다소 떨어졌다.[* 다만 고구려가 백제, 신라 중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적당히 견제만 함으로서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보단 서로 싸우는 것에 국력을 더 투자했으므로, 영류왕의 남방 정책이 반드시 실책이라고 할 순 없다.][* 실제로 영류왕 사후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은 백제와 신라의 분쟁에서 백제의 편을 들면서 백제(+왜)와 유기적인 연계를 하는데 성공하지만, 외교적으로 고립되어버린 신라가 극단적으로 당나라에 의존하는 나당동맹을 성립하게 만들었고, 이 동맹으로 인해 [[백제]]가 멸망함으로서 고구려 남쪽 국경이 신라에 의해 더욱 직접적으로 위협받게 된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고구려]]와 [[당나라|당]]의 상대적 국력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고구려는 육로에서 당나라와 교전 내지는 전쟁 준비 중이었다. 고구려가 강대국이기는 하지만 [[고구려]]의 국력을 보면 남쪽과 북쪽 모두에서 수십만 규모의 [[양면전쟁|양면전선]]을 수행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대규모의 양면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국가는 [[당나라]] 뿐이었다.] 상대방을 두들기면서도 제3국에 강력한 유인과 압박을 제시하기에는 [[당나라]]가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 이는 [[양제(수)|양제]] 때 완성된 [[대운하]]가 [[당나라]] 때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여 강남 곡창지대의 막대한 생산량을 운하를 통해 쉽게 운송할 수 있게 되면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물자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구려도 물자 생산력이 높긴 하지만 당은 동원할 수 있는 물자량이 상대적으로 고구려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많았다.] 다만 기록 자체가 당나라 입장에서 쓰인 것들이 대부분이라 고구려가 자체적으로 외교를 한 흔적에 대해서는 많이 부실하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당나라가 주변국 통제에 성공했다는 것은 동쪽 한정으로, 그것도 요동반도 한정이었다.[* 일시적으로 [[고구려]] 직접지배지역을 통제했다지만 [[발해]]의 건국까지 [[안동도호부]]가 계속 이전해온걸 감안해보면 점점 상실해가고 있었다는걸 확인할 수 있다.] 당나라가 고구려와 치고받는 데 온 국력을 쏟는 바람에 서쪽에서 토번이 당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결국 고구려가 멸망한 지 겨우 1년 만에 토번과의 외교 실패로 완전히 적대 관계로 돌아섰고 신라와도 관계가 틀어져 [[나당전쟁]]을 벌였으나 패하고 만다.[* 다만 국력에서 신라도 열세였던터라 신라는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다. 특히 나당전쟁에서 신라도 패전을 수없이 했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쪽은 고구려와 달리 끝내 성장을 막지 못해 [[안사의 난|약 100년 뒤에는 수도까지 털리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결국 길게 보자면 당나라 역시 나중에 가면 고구려와 같은 딜레마에 처하게 된 셈이다.[* 무엇보다 이는 반복되는 전쟁으로 인해 농민들이 끊임없이 병사로 징집되면서 부병제를 구성하는 핵심인 자영농층의 규모가 감소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당의 물자생산력을 지원해줄 부병제가 흔들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안시성 전투, 나당전쟁에서의 패전 등으로 당이 장거리 원정에서 군사력의 한계를 보여주자, 그간 당에 강력하게 복속되어있던 기미주들이 반기를 들며 다시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당은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를 막고 전쟁을 지속적으로 벌여 자영농들에게 지급할 농토를 확보하는 동시에 자영농들의 몰락을 막기 위해 장기전을 피하고 단기전을 목표로 해야 했으며, 동시에 군사력 과시를 위해 병사들의 훈련도를 최상으로 유지해놓아야 하는, 그야말로 단 한 가지의 실수도 해서는 안 되는 체제를 당 전기 내내 유지해야했다. 그러나 위징이랑 신하들의 반대에도 당태종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안시성]]에 출전했다가 참패하고 나당전쟁에서도 신라를 이기지 못하는 등 전쟁이 장기화되고 패전을 통해 군사력 과시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이미 당태종 말기부터 당의 군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당나라군|당의 군제]]를 구성하는 핵심인 부병제와 기미지배체제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토번을 막지 못한 이유도 있으며, 단순히 토번과의 외교문제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더욱이 [[고구려]]는 [[당나라]]에게 '''능동적인 외교 전략을 펼 여지도 없었다.''' [[당나라]]는 아예 고구려를 멸망시킬려고 칼을 갈고 있었고[* 당시 당은 자국을 위협할 만한 위치에 있는 마지막 나라로 고구려를 점 찍어둔 상태였다. 이미 돌궐이나 말갈 등은 대부분 당에 복속된 상태였고, 토번은 아직까지 당을 위협할 정도도로 성장하기 전이었다. 신라 역시 당과 적대하지 않았다. 당은 고구려만 지워버리면 그야말로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3차 전쟁까지 이겼다면 당나라내에서도 고구려는 중원질서와 다른 예우를 논하고 있던터라 능동적인 외교 가능성이 상존했었지만 고구려는 그것을 버텨내지 못했다. 당시 신라는 실권층인 [[김유신]], [[김춘추]] 등 일부 인사들이 신라가 삼한을 통일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삼한일통]]은 신라에게 있어 사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체제가 고착화된 이후로 신라는 백제에게 예방전쟁을 포함한 이런저런 전쟁으로 인해 대야성을 비롯한 많은 땅을 뺏기면서 수도 서라벌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고, 당시 고구려는 당과 동맹 관계였던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백제의 신라 공격을 관망하거나 650년대에 들어서는 이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신라로서는 여제 양국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국가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즉, 신라에게 삼국통일은 단순히 땅따먹기나 한반도의 유일한 나라가 되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그야말로 국가의 장기적인 생존이 걸린 엄청난 도박이었다.][* 단, 고구려의 압박도 거셌지만 신라에게 주적은 단연 백제였고 실제 백제가 망하고 부흥운동이 진압된 이후에는 신라로서도 고구려 원정에 까지 적극적으로 나설 동인이 사라졌다. 실제 백제 멸망과 고구려 멸망 사이 신라의 행보를 보면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에 소극적으로 동참하며 사실상 관망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백제를 택하고 신라를 압박한 것이 고구려로서는 딱히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남방에 우군이 없던 시절, 돌궐과 싸우는 도중에 한강 유역을 상실했고, 수나라와 싸우는 도중에 신라에게 500리의 땅을 빼앗겼으며 백제와도 교전이 있었다. 또한 연개소문이 동맹을 맺기 이전까지 백제 신라 할 것 없이 당나라에 고구려 견제를 요구할만큼 양면 전선의 위험은 존재했다.[* 백제를 선택한 이후에는 신라가 고구려 남방을 칠 때면 백제의 역공으로 견제가 가능하고, 공세로 나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가 멸망하는 순간, 당나라 35군의 5할이 평양을 직공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백제와 신라는 이미 6세기 중반부터 원한이 깊어 주변국의 중재에도 싸움을 그치지 않는 상황이었다. 큰 세력을 우리 편으로 하고 작은 세력도 적으로 안 두고 달랜다는 것이 말이야 듣기 좋고 가능성 여부는 판단하기 나름이지만 최소한 백제를 선택한 것을 전략의 부재라고 보는 것은 고구려가 멸망했다는 결과만 보고 내린 무지와 폄훼에 가깝다. 거기다 백제는 멸망하기 직전인 [[의자왕]] 때까지만 해도 지속적으로 신라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단지 의자왕 후기에 귀족들과 왕족들간의 대립을 제대로 중재하지 못하여 지배층이 분열된 것이 문제였고, 당시만 해도 아무도 이런 내부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고구려로서는 당의 도움 없이는 백제를 견제하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신라보다는 독자적으로 신라를 견제하는 것이 가능한 백제를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게다가 신라와의 동맹에 있어 가장 큰 위험은 바로 백제 영토의 분할이었다. 신라가 백제를 반원형으로 감싸는 형국인 마당에 만약 신라를 도와 백제가 멸망한다면 백제의 영토는 고스란히 신라가 독점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당나라조차 바다 건너 백제 땅을 관리하기 어려워 나당전쟁 때 신라에게 빼앗기는데 하물며 중국과 총력전을 펼치는 고구려 입장에서는 신라가 백제 영토를 독식 하지 않을 보장도 없었다. 그리고 신라가 자치한 한강 유역은 고구려가 굉장히 원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어떤 점에서 백제가 신라보다 나은 것이 당연하다.][* 게다가 영토분할이 [[신라]]에게도 힘든 이유가 한강유역 및 적어도 [[당항성]]을 기점으로 이 북을 고구려에게 준다고해도 신라의 안전보장이 어려웠다. [[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때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도성 하루거리까지 쳐들어와서 군사 활동을 매우 대규모로 해왔던 국가라는걸 신라는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수전쟁]] 이전에도 [[영양왕]]이 물밀듯이 쳐들어와서 영역을 확보했던 전례까지 확인해보면 한반도 한강 남부 영역을 잘못 분할했다가는 순식간에 [[소백산맥]]라인까지 밀려버릴 수 있다는 공포감이 작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신라의 입장이었다.] 또한 슈퍼파워인 [[당나라]]를 상대함에 앞서 단합을 해도 막아낼까 말까 하는 상황에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사망 직후 그의 아들들이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이며 [[내전]]에 빠졌고, 대막리지라는 고위직 중의 고위직 [[연남생]]이 스스로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는 막장 상황이 연출되었다. 내부에서 이렇게 분열하면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려 할애비라도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지배층이 분열되었음에도 중반까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내고 있고 나당연합군이 고생하던 것이야말로 고구려의 국력이 상상 이상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3차 여당전쟁에서 당나라는 요동방면으로만 50만 대군이라는 이전과 비교할수 없는 압도적인 물량을 동원했고 연남생의 항복으로 국내성 부근까지 당나라에게 넘어간 상태로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신성 공략에만 무려 7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모되었다.] 고구려 패망의 일차적인 책임은 [[연개소문]]의 세 아들들에 있겠지만, 권력을 독점하며 세 아들의 후계 구도마저 명확하게 정해놓지 않은 채 무책임하게 저승으로 가버린 연개소문 본인의 실책 역시 매우 크다.[* [[연개소문(드라마)|드라마 연개소문]]이나, [[평양성(영화)|영화 평양성]]에서는 연개소문이 자식들의 후계구도를 확실히 잡아놓는 것으로 묘사되나, 이는 대단한 역사왜곡이다. 고구려 멸망의 시작은 군권과 정권을 모두 독점하고 있던 연개소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있다고 할 정도로 연개소문의 죽음은 고구려 멸망의 큰 원인이다.] 특히 고구려는 가뜩이나 신라와 당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전선이 점점 뒤로 밀리고 양면 전선 끝에 수도 지역에서 공방전을 벌이는 등 국력이 한계에 달하고 있던 시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